이달의 인물: 장인을 향한 끝없는 도전…삼성테크원㈜ 김일록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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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 향한 끝없는 도전…삼성테크원㈜ 김일록 기장

도전에 도전 거듭하며 최고를 꿈꾸는 화려한 ‘용접인생’
명확한 기준을 상실한 채 불확실한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딛고 나아가야 할 지반도 도통 없는데... 감히 말하자면 ‘쾌락’이다. 자고로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좌절을 극복해내는 힘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도전이라는 것을 한다.

도전은 성공과 실패,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이라는 것은 칭송된다. 도전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젊은이의 도전이야말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도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지향이 있다는 것. 그 뿐만이 아니다. 도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과 쾌락, 그리고 실패와 좌절의 가능성이 공존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나가 도전의 끝에는 성공과 환희를 맛보길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통과 슬픔이 따를 수도 있다.

실패의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부여하는 불안정을 모두 감수하고 쟁취한 성공과 쾌락만큼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용접저널 이번 호에서는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며 용접계에서 최고를 꿈꾸는 용접인을 소개할까 한다. 삼성테크원㈜ 김일록(46) 기장이 바로 그 주인공. 그와의 인터뷰, 그리고 수기를 통해 그의 용접인생을 재구성해봤다.

‘축구선수’를 꿈꾸던 소년, 가난 앞에 꿈을 접다
충남 논산의 한 시골마을, 미래 유명한 축구선수를 꿈꾸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바로 1963년 생인 삼성테크원㈜ 김일록 기장의 어린시절. 김 기장은 어린 시절 운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축구는 당시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초등학교 대표선수로 군대회에 참가해 입상까지 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그러나 당시 그의 집은 그 여느 시골마을이 그렇듯 너무도 가난했었고, 그가 마냥 축구선수를 바라기엔 따라야 하는 지원이 커야 했다.
축구부가 있는 도시로 중학교 진학을 해야 했지만 이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부모님을 막무가내로 졸라보기도 하고 매달려도 봤지만, 논과 밭 한 평도 없이 기껏해야 남의 밭을 소작해 채소나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는 집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시골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그의 ‘축구선수’ 꿈은 무너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부모님에게 먼저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않겠다고 선언한다. 빨리 사회에 나가 기술이라고 배워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하고 싶었던 것. 하지만 이에 대해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하셨다고. 결국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인문계고와 실업계고의 선택을 두고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무난하게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리고 2학년이 되던 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는 바로 그때 ‘용접’을 선택했다. 이게 바로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선택’이었다.



김일록 기장만의 ‘Know-How’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공을 ‘용접’으로 선택한 이후 그는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3년 동안 학교 성적은 줄곧 상위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취업과 대학진학이라는 또 한번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대학진학을 권유했고, 그의 당시 담임선생님 역시 대학에 진학해 그 분야에 대해 깊이 공부해 유능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대학진학을 추천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고등학교 입학 당시 꿈꿨던 ‘기능인’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면 야간대학에 진학하겠노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 용접과 배관, 제관 등을 주 업무로 취직했다. 당시 그는 주·야간 근무를 2교대로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야근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그래도 그는 묵묵히 해냈고, 월급을 받으면 하숙비와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부쳤다.
그렇게 그 곳에서 4년 6개월을 근무하고 그는 병역의 의무까지 다 마쳤다. 그리고 1986년 부산에 있는 철강회사 보온관 사업부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업무는 역시 용접·배관 이었다.
김 기장은 “당시 정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며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기장은 “그때의 난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손놀림과 동작 하나하나를 배웠고, 머릿속에 기억하거나 메모를 해뒀다가 선배들이 퇴근하면 혼자 남아 실기 연습을 하거나 야근 작업할 때 기능을 익히곤 했다”고 설명했다. 참으로 열정적이지 않은가. 그 누구의 가르침 없이 혼자 어깨너머로 그 기술을 익혔다니. 천상 용접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용접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던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선배들의 마음이 돌아설 만큼의 매력이 있었던 걸까. ‘청기와 장수’마냥 거들떠도 안보던 선배들은 그에게 하나하나 기술을 전수해줬고, 그의 용접 실력 또한 안정돼갔다. 스스로 자신을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평가한 그는 선배들이 가르쳐주면 가르쳐준대로 고지식할 정도로 용접을 했고, 이러한 점이 장점으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 기장은 “이런게 바로 ‘Know-How’아니겠습니까”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더 이상의 장벽은 없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괜히 명장이겠는가? 모든 고난과 역경, 시련을 견뎌내고 마침내 결실을 맺은 이들이 명장 아닌가. 그에게도 또 한번의 시련이 다가오게 된다.

다시 시작하게 된 ‘공부’
그렇게 모든게 안정되어 갈 즈음에 그는 직장 이직문제로 큰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시 회사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력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쳤고, 이는 그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됐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대졸학력이 아니면 승진이 어려웠고 관리직과 현장직의 차별도 심했다고. 그래서 결국 그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잡는다.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의 벽’에 부딪힌다. 동생들의 학비,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 그는 대학진학을 과감히 포기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전혀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연히 신문에서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 의 경력사원 모집공고를 보게 된다. 그는 주위에서 삼성의 인사정책이 학력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정보를 듣고 삼성항공 공채시험에 응시했고, 당당히 입사하게 된다.
입사 후 그는 일주일간의 입문교육을 마치고 항공기 엔진 생산부서에 배치를 받아 항공기 엔진 정밀 용접을 하게 된다. 당시 항공기 엔진 정밀 용접에는 특수용접인 TIG 용접이 적용되는데, 이는 그가 전 직장에서 배운 용접이라 쉽게 적응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그는 ‘이 곳을 평생 직장으로 삼으리’라는 마음을 다잡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능을 발휘해 우리나라에서 항공기엔진 정밀 용접분야에서 최고의 장인이 되리라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결혼을 하게 됐고, 이는 그에게 더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점차 안정화 될때 즈음, 그는 회사에서 최고의 기능인이 되고자 용접기능사 1급에 도전했다. 결과는 실패.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도전했고 결과는 당당히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는 회사에서 각종 교육과 품질 분임조장을 맡아 사내 품질관리 발표를 활발히 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의 품질 목표는 고객의 비행안전 최우선”이라며 “본인 스스로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인의 경쟁력이 회사의 경쟁력이요, 회사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만든 항공기 엔진이 영공을 수호하며 국토를 방위한다니 가슴 뿌듯하고 보람있는 직업”이라고 뿌듯해했다.

끝없는 도전으로 이뤄진 ‘용접인생’
끝인 것 같은가? 그의 인생은 지속적인 도전으로 이뤄져 있는 듯 하다. 당시 스스로를 현장실무는 뛰어나지만 이론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던 그는 기능인의 ‘최고봉’인 기능장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 1996년 3월, 회사의 추천을 받아서 창원기능대학 야간 기능장 과정 용접학과 2년에 입학을 하게 된다.
낮에는 회사 근무를 하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니는 ‘샐러던트(Saladent: 직장인을 뜻하는 샐러리맨(Salaryman)과 학생을 뜻하는 스튜던트(Student)의 합성어)’의 생활이 이어졌다. 비록 35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지만,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론과 실무를 접목시켜 용접분야의 최고, 아니 항공엔진 용접분야의 최고의 기능, 기술인이 되어 보리라 굳게 다짐을 한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자정이 되서 들어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 아내와 자녀들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그는 특히 서운했을 법도 한 가운데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그의 기능대학 2년 동안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으며, 그렇게 약 2년 간의 꾸준한 노력 끝에 용접기사 2급 취득에 이어 용접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훌륭한 기능인이 되겠다고 다짐한지 약 17년 만에 이뤄낸 쾌거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판금제관기능장을 취득했다. 회사에서는 최초로 기능장 자격증 2개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대학원 출신도 어렵다는 기술사 자격 취득에 도전하게 된다. 특히 창원기능대학 설립이래 18년 동안 아무도 재학 중에 취득하지 못한 ‘신의영역’이라던 기술사 자격증에 그는 전력투구했고, 결국은 해내게 된다. 기술계를 통틀어 기능장, 기술사를 동시에 석권하며 용접계에 ‘한 획’을 그은 것이다.
그는 “수 년간의 꾸준한 노력, 피 말리는 나 자신과의 싸움,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산업설비분야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배관기능장에 도전해 자신이 목표했던 기능장 3개와 기술사 자격증을 보유하고자 했다. 그는 이 마저도 해냈고,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기술을 전수하고 지도하기 위해 기술 지도사 자격증 또한 취득했다. 그리고 정보화시대에 필수요소라던 O.A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 E-TEST 3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용접분야의 전종목 자격 취득과, 아울러 산업설비 분야인 용접, 배관, 판금제관 기능장, 용접기술사를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셈이다.
특히 그는 못 다 이룬 공부를 위해 2002년 9월 4년 동안 틈틈이 평생교육원을 통해 학점을 취득했고, 교육부 인정 기계공학 학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1998년 가을부터 창원대학, 2001년 창원기능대학, 2002년 마산창신대학 등 3곳에서 교양학점 30학점을 취득해 그 동안 취득한 각종 자격증을 합쳐서 공학사 학위를 받은 것. 비록 4년제 대학은 졸업하지 않았지만 4년제 대학 과정과 동등한 공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4년 창원대 산업대학원 기계공학과에 진학해 현재 3학기에 재학 중이다.

단념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패배’는 없다
일찍이 미국의 철학자 나폴레온힐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면밀한 계획을 세워라. 만약 당신이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완전히 성공을 거둘 때까지 몇 번이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라. 마음속에서 단념해 버리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패배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에 김 기장은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했다.
지난 1998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고 그 위기가 가져온 변화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집어 삼킬 듯 참담했다.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실직자, 퇴출기업, 퇴출노동자... ‘오히려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이사회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당시는 현재 우리네 사회에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빼앗아간 시점이기도 하다.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구조조정의 대상이 38세까지 내려왔다는 ‘38선’, 45세가 정년이라는 ‘사오정’, 56세가 돼서도 회사에 붙어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 라는 웃지 못할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이는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냉혹한 현실로 자리매김했다.
김 기장은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너무도 안타깝다”며 “20대 태반이 백수라면서, 구조조정 대상이 38세까지 내려왔다면서, 기능인은 너무도 부족해 외국의 노동인력이 없으면 중소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니 아이러니할 뿐”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김 기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무엇보다도 잘하는 일을 자신의 평생 일자리로 삼아야 된다”며 “뚜렷한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세우고, ‘평생직장’보다는 ‘평생직업’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덧붙여 “글로벌 경제시대는 무한경쟁시대”라며 “어디서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생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진인사대천명 : 盡人事待天命
김 기장은 “자고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했다”며 “그렇게 보면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자신이 가진 용접관련 노하우 등 모든 지식을 전수하고 후학 양성에 매진해 ‘3D직종’이라고 인식돼있는 용접산업의 발전을 위해 더 뛰어야 한다고.
김 기장은 “대한민국의 뿌리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인력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진정한 마스터 양성에 일조하겠다고 야심찬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 때가 된다면 그동안 일에 치여 전하지 못했던 사랑을 가족과 주변사람들 모두에게 베풀고 싶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김 기장은 “용접을 더 이상 낙후된 3D 산업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면서 용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향상과 용접교육기관 확충 및 용접 전문가 인력 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마지막까지 ‘용접’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 문의: 삼성테크원㈜ TEL: 055-260-2418

(취재.정리: 용접저널 취재부 김가애 기자(Journalist Kim Ga Ae)
제2회부산국제용접&절단&레이저설비산업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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